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삠참이

저기, 해가 지는 곳에.






미소는 전설 속 비밀의 열쇠처럼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아빠에게서 내게로 부탁되었다.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게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훔친 것은 티켓이나 돈이라기보다 목숨이다.

나는 이미 많은 이의 증오를 뒤집어썼다.


우리는 어디로 가?

우리는.......여름을 찾아서.

여름은 어디에 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켰다.

저기, 해가 지는 곳에.


희망은 내가 움직여야 닿을 수 있는 대륙이 아니라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다 보면 나타나는 밝고 따듯한 계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서 그 계절을 맞이하는 것뿐인지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겠지.

희망이란 시간처럼 머무르지 않고 오고 가는 것.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서 

나는 내가 정말 아빠를 닮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빠를 닮은 게 아니라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이다. 그 말이 나를 아빠처럼 만들었고.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 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 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힘들어서라는 걸. 그래서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는 

엄마의 죽음도 나의 삶도 견뎌 낼 수 없다.


나는 도리의 상처를 모르고 도리는 나의 상처를 모르고, 그러니까 서로를 지금 그대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새로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그런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미소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이다. 미소는 강하고, 미소는 더 자랄 것이다. 어엿한 어른이 

될 것이다. 미소의 기억에서 나는 점점 어려질 것이다. 그때는 언니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언니도 어렸어, 겨우 20대 초반이었어,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려면

하루하루가 필요하다. 시간을 건너뛸 수는 없다.


우리 조금만 참자. 마음으로 천천히 100을 셀 동안만 울음을 참자. 그건 도리가 말해 준 방법이었다.

마음으로 천천히 100을 셀 동안만 참아 보는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많은 기억과 생각이 있다. 잊지 않으려고 그것들을 아주 짧은 문장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곤 했다. 기나긴 이야기와 감상은 생명처럼 짧아지고 짧아져 결국 한 단어가 되었고

심장에 박혔다. 나의 심장에도 보석이 있고 그 빛은 푸르다. 내가 건지 심장의 그것을 알아챘듯

언니도 내 심장의 그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보석이 된 내 약속은 영영 변치 않을 것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