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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

새 보금자리




삠참이가 취한 관계로 새 집의 첫글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첫 블로그를 떠나오게 됐지만 덕분에 블로그 개설 1주년을 맞아 초심으로 돌아가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내가 쓴 첫번째 글은 뭐였는지 다시 읽어봤는데, 1년간 별일 없었지만 많이 생각하고 이런저런 감정도 겪으면서 좀 굳건해진 것 같아 기쁘다. 글도 그때보단 더 잘 쓰게 된 것 같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아도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성장하는 모양이다.


올해 초에 썼던 야심찬 2018년 목표 목록도 발견했다. 많이 달성하진 못했지만 그런대로 의도한 곳으로 향하고는 있다.


일기를 안 쓴 지 오래된 김에 업데이트를 해본다. 10-11월에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절실히 느꼈다. 역치가 한없이 낮아져서 조금만 자극이 주어져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가 아침부터 밤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천천히 극복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림이 사실 꽤 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도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지만 몇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올해 5월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퇴화했던 손을 되살리다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또 고2때 이후 처음으로 덕질할 것이 고갈된 상태이다...! 한 친구가 최근에 해리포터에 빠져서 리커버본 전권을 살까 고민하고 있던데 그렇게 여가시간을 쏟아부을 뭔가가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리고 진로 고민을 아예 맨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다. 책태기가 왔고 이 역시 극복 중이다. 언어학에 큰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변화는 중요하다. 내 몸은 보수적이지만(=게으르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한다. 최근에 많이 지쳐 있었는데, 머리를 확 자르고 나니 다시 삶에 열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종종 새로고침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래서 삠참이 덕에 올해 하반기가 넘 재밌었던 것 같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둘만의 오픈채팅방을 만들거나, 연성챌린지를 하거나... 오늘 호다닥 이사온 이 새 보금자리도 그렇다. 덕분에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치 열정은 충전되었다.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는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내는 방법을 몰랐다. 맥주를 한 캔 사서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칠흑 같던 하늘이 파랗게 밝아올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못했다. 우리가 그 무렵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몇 시간이고 물고 늘어졌던 주제는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 언제나 서로의 견해는 대화가 지속될 수 있을 만큼은 달랐고, 대화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은 비슷했다.


정영수 작가의 <더 인간적인 말>에 나오는 이야기다. "언제나 서로의 견해는 대화가 지속될 수 있을 만큼은 달랐고, 대화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은 비슷했다." 이것은 내 2018년 최고의 문장들 중 하나인데, 어떤 사람이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잘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 가치관이 맞는 사람, 취향이 소름돋게 똑같은 사람보다 찾기 힘든 게 대화하기 재미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덕질 얘기를 하든 일상 얘기를 하든 학문적인 얘기를 하든, 어떤 주제를 꺼내도 몇 시간이고 신나서 떠들 수 있는 상대방. 살면서 그런 사람은 너그럽게 쳐줘야 서너 명, 너그럽게 쳐주지 않으면 삠참이 한 명뿐이었는데(......) 앞으로 평생 그런 사람을 또 한 명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행운이 넘치는 인생일 것이고 아니더라도 삠참이가 계속 나랑 수다떨어 주겠지...??!? 




우린 이제 이사까지 같이 해본 사이가 되었다. 작년 11월 24일(사실 23일 밤), 삠참이와 설빙에서 데이트하다가 우리 같이 블로그 할까?! 신난다!! 하고 들떠서 그날 당장 첫 블로그를 만들었었다. 우리는 그 이전부터 나중에 같이 살자며 미래 얘기를 하곤 했지만, 한 아이디를 공유하고 블로그를 꾸미던 것은 정말로 삠참이와 무언가를 '같이' 하는 첫출발처럼 느껴졌다. 그저 상상인 것처럼 여겨지던 함께하는 미래가 좀더 진지한 계획이 되었다. 누군가와 진지한 관계라는 건 이런 거구나.

올해에 이어 내년도 이곳과 함께 즐겁게 보낼 것이다. 내년뿐 아니고 우리집이 10주년을 맞을 때까지 오래오래 함께하자.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일어나서 삠참이의 첫 글을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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